仁川李氏의 先系는 가야계의 許氏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모든 허씨들의 세보(世譜) 이전의 인물임으로 명확한 上代의 出系는 상고 할 수 없으나 다만 서기 755년 (乙未 신라 경덕왕 14년)에 아찬(阿飡)의 벼슬로 계신 허기(許奇)(허황후의 23세손)께서 신라(新羅) 사신으로 唐나라에 갔을 때 그해 11月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여 당헌종(唐玄宗)이 756丙申년에 촉(蜀) 나라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許奇께서 호종(扈從)하였으며 757丁酉년에 난이 평정되어 황제가 도성으로 돌아와서 이를 가상히 여겨 시서(詩書)와 황제의 姓인 李성을 사성(賜姓) 받아 무술년(戊戌758年)에 신라로 환국 하심에 신라(新羅) 경덕왕께서 친히 그 공을 높이여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를 봉하여 세습케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허씨에서 이씨가 되었으니 우리는 이허기(李許奇)선조를 득성조(得姓祖)라 한다.

※ 아찬(阿飡):신라 17관등중 여섯 번째 관등
서기 42년(신라유리왕19년)에 金首露大王께서 경남 일원에 駕洛國을 세우고, 印度 아유타국(阿踰他國)의 공주 許皇玉을 서기 48년에 왕비로 맞이 하셨다.

수로왕께서는 普州太后(허황후의號)와의 사이에 열분의 왕자를 두셨는데 첫왕자 태자 居登은 가락국 제2대 道王이 되고, 둘째왕자 거칠부는 어머니 허황후의 姓을 따라 명월성의 성주가 되었다.

세째왕자 明 또한 어머니의 姓인 許氏姓을 따랐으며, 나머지 일곱왕자는 印度에서 온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入山하여 七佛寺의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許氏는 居住地에 따라 양천(陽川), 태인(泰人), 하양(河陽), 김해(金海)등으로 관향(貫鄕)을 달리하고 있으나, 모두가 보주태후 허황후의 후손들이다.

현존하는 許氏는 위 許氏四本이 大宗을 이루고 있으며, 각 始祖 貫鄕祖는 허황후의 30세손, 33세손, 35세손이다.

왕후의 성은 허씨(許氏)요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이니 아유타국(阿逾他國)의 왕녀(王女)라 하고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왕녀라고도 하였다.
동한(東漢) 건무(建武) 二十四年 수로왕(首露王) 七年 무신(戊申)七月에 왕후가 아유타국(阿逾他國)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이르니 왕(王)이 유천간(留天干)(留天은 사람의 이름)에게 명하여 망산도(望山島)에 올라 망을 보게 하였는데 비단 풍석(風席)을 달은 범선(帆船)이 붉은 깃발을 꽃고 서남방으로부터 북을 향하여 달려 오거늘 왕이 궁성(宮城)의 서쪽에 만전(장막으로 된 임시의 居所)을 베풀고 기다렸다.
왕후가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 고교(高교)(山이름)에서 휴식하고 입은 바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을 드렸다. 그 곳에 당도하자 왕이 만전에 맞아들이고 이틀을 경과한 다음에 함께 연(輦)을 타고 궁전(宮殿)으로 돌아와 왕후를 삼았다.
한영제(漢靈帝) 중평(中平) 六年(西紀一八九年) 기사(己巳)三月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百五十七歲였다. 옛도읍 토성(土城) 바깥 구지봉(龜旨峰) 동쪽에 장사지냈으니 왕능(王陵)과 三百餘步의 거리가 되고 건해득수(建海得水) 병파(丙破)로서 왕능과 더불어 남북으로 마주 바라보였다.
왕자(王子) 十人을 두었는데 자신이 동쪽 나라에 멀리와서 성(姓)을 전할 수 없음이 슬프다고 하소연하거늘, 왕이 측은하게 여겨 두 왕자에게 왕후의 성을 사성(賜姓)했으니 우리나라에 허씨(許氏)가 이에서 발단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왕후가 처음 와서 배를 맨 곳을 주포(主浦)라 이르고 비단바지 벗은 곳을 능형(綾峴)이라 이르며 붉은 깃발을 바다에 넣은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했다

왕(王)의 성(姓)은 김씨요 이름은 수로(首露)이니 김해(金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伽倻)라고 하였다.
동한(東漢) 광무(光武) 十八年(西紀四二年) 임인(壬寅) 二月 日(一本에는 壬寅三月三日이라고 하였음)에 비로소 탄강(誕降)했으니 이상한 기운이 구지봉(龜旨峰)에 생겨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웠거늘 가락(駕洛)의 구간(九干) 아도(我刀)等(新羅의 方言에 君長을 干이라고 이름했으니 九干은 곧 我刀干汝刀干 留天干의 類임)이 나아가 살펴본즉 붉은 끈으로 금합을 매어 내려져 있었다. 이에 금합을 열어 본즉 금빛이 찬란한 알이 여섯 개가 있어 해와 같이 둥글거늘 아도(我刀)의 집에 받들어 간직하였다. 다음날 알이 깨어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나이 십오세 가량 되고 용모가 준수하거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절하고 하례(賀禮)하였다.
그 동자(童子)가 날로 숙성하여 십여일이 지나매 신장이 구척이나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드디어 그 한사람을 받들어 임금을 삼았으니, 그가 곧 수로왕(首露王)이었다.
금합에서 알이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고 제일 먼저 낳았으므로 인하여 수로(首露)라고 이름했으니, 이는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十九年때의 일이었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지방을 나누어 오가야(五伽倻)의 군장(君長)이 되었다.
수로왕(首露王)은 재위(在位)한지 一百五十八年에 세상을 떠났으니 곧 한헌제(漢獻帝) 건안(建安) 四年(西紀一九九年)의 일이요, 향년(享年)이 百五十八歲였다. 납능(納陵)에 장사했으니, 능(陵)은 왕(王)의 옛 도읍 토성(土城)안에 있어 임좌병향(壬坐丙向)에 건득병파(乾得丙破)요 읍성(邑城)의 서쪽 백보의 거리가 되었다.
양(梁)나라 대통(大通) 四年(西紀五三○年)에 나라가 멸망했으니 구세(九世)를 전(傳)하고 역년(歷年)이 四百九十一年이었다. 수로왕(首露王)이 왕자(王子) 열을 두었는데 왕비(王妃)의 말에 감동되어 두 왕자에게는 왕비의 성(姓)을 사성(賜姓)하였다.
수로왕(首露王)의 세대에 정치가 순후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동지일(冬至日)에는 제사에 대로(나라 제사에 소를 통으로 쓰는 것을 대로라고 함)를 쓰고 왕비로서 배향했으니, 이 사실은 동사(東史)와 왕능 비석에 실려 있다. (五伽倻는 모두 영남(嶺南)에 있다. 大伽倻는 一名 任那이니 지금의 高靈이요 小伽倻는 지금의 固城이며 碧珍伽倻는 지금의 星州요 阿羅伽倻는 지금의 咸安이며 古靈伽倻는 지금의 咸昌이다. ○譜牒에서 나왔음 以下同)
왕(王)의 성(姓)은 김씨요 이름은 수로(首露)이니 김해(金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伽倻)라고 하였다.
동한(東漢) 광무(光武) 十八年(西紀四二年) 임인(壬寅) 二月 日(一本에는 壬寅三月三日이라고 하였음)에 비로소 탄강(誕降)했으니 이상한 기운이 구지봉(龜旨峰)에 생겨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웠거늘 가락(駕洛)의 구간(九干) 아도(我刀)等(新羅의 方言에 君長을 干이라고 이름했으니 九干은 곧 我刀干汝刀干 留天干의 類임)이 나아가 살펴본즉 붉은 끈으로 금합을 매어 내려져 있었다. 이에 금합을 열어 본즉 금빛이 찬란한 알이 여섯 개가 있어 해와 같이 둥글거늘 아도(我刀)의 집에 받들어 간직하였다. 다음날 알이 깨어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나이 십오세 가량 되고 용모가 준수하거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절하고 하례(賀禮)하였다.
그 동자(童子)가 날로 숙성하여 십여일이 지나매 신장이 구척이나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드디어 그 한사람을 받들어 임금을 삼았으니, 그가 곧 수로왕(首露王)이었다.
금합에서 알이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고 제일 먼저 낳았으므로 인하여 수로(首露)라고 이름했으니, 이는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十九年때의 일이었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지방을 나누어 오가야(五伽倻)의 군장(君長)이 되었다.
수로왕(首露王)은 재위(在位)한지 一百五十八年에 세상을 떠났으니 곧 한헌제(漢獻帝) 건안(建安) 四年(西紀一九九年)의 일이요, 향년(享年)이 百五十八歲였다. 납능(納陵)에 장사했으니, 능(陵)은 왕(王)의 옛 도읍 토성(土城)안에 있어 임좌병향(壬坐丙向)에 건득병파(乾得丙破)요 읍성(邑城)의 서쪽 백보의 거리가 되었다.
양(梁)나라 대통(大通) 四年(西紀五三○年)에 나라가 멸망했으니 구세(九世)를 전(傳)하고 역년(歷年)이 四百九十一年이었다. 수로왕(首露王)이 왕자(王子) 열을 두었는데 왕비(王妃)의 말에 감동되어 두 왕자에게는 왕비의 성(姓)을 사성(賜姓)하였다.
수로왕(首露王)의 세대에 정치가 순후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동지일(冬至日)에는 제사에 대로(나라 제사에 소를 통으로 쓰는 것을 대로라고 함)를 쓰고 왕비로서 배향했으니, 이 사실은 동사(東史)와 왕능 비석에 실려 있다. (五伽倻는 모두 영남(嶺南)에 있다. 大伽倻는 一名 任那이니 지금의 高靈이요 小伽倻는 지금의 固城이며 碧珍伽倻는 지금의 星州요 阿羅伽倻는 지금의 咸安이며 古靈伽倻는 지금의 咸昌이다. ○譜牒에서 나왔음 以下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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