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할아버지를 알자2편~

삼수리와 삼장사

북면 삼수리는 본래 초산리의 일부였다. 그런데 고려말 공민왕 때 순찰사였던 이전생이 이곳에 살면서 징석, 징옥, 징규라는 삼형제 장사를 낳으니 그로 인하여 삼수리가 되었다. 이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들 삼형제가 태어날때 그의 어머니가 태몽에 장남 징석은 영축산이 현몽하였기 때문에 취봉이라고 이름짓고, 차남 징옥은 원적산이 현몽하였기 때문에 원봉이라 하고, 삼남 징규는 금정산이 현몽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금봉이라고 하였다.

이들 삼형제들은 각각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징석은 백운암에서 글공부하고 영축산 산봉 평원에서 무예를 닦았으며, 징옥은 원효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원적산 산상평원에서 무예를 닦았다.
그리고 징규는 금정산 금봉탕 앞에서 글공부를 하고 금정산 산상 평원에서 무예를 닦았다. 특히 징규가 무예를 닦았다는 금정산 고당제 근처에는 아직도 마애여래불좌상이 남아 있는데 이를 두고 일명 이징규장군의 자화상이라고도 한다.

징석과 징규는 유년 때 호랑이를 타고 글공부하러 다녔기 때문에 어머니는 크게 걱정하였으나 아버지는 마음 속으로 옛부터 위인될 자는 대호가 먼저 알아보는 법이라면서 크게 기뻐하셨다.

그리고 이들 3형제 는 자랄 때 많은 설화를 남겼는데 그 중 역사문헌에 소개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50여명의 도적떼를 사로 잡았다는 설화) 징석은 13세, 징옥은 9세, 징규는 7세 때의 이야기이다. 이들 3형제는 서당에서 돌아오다가 양민의 재산을 약탈해가는 50여명의 도적떼를 발견하자 모두 사로 잡았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본 고을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보고 날개가 달린 장사라고 이름하게 되었고 혼이 났던 도적떼들도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두번 다시 이 고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고을에는 도적떼로 인한 민폐가 없는 평화롭고 밝은 고을이 되어 마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를 삼장사 민요의 시초라 하기도 한다.
"방아로 구나~! 방아로 구나~!
해가지면 달님이 뜨고 달님이 지면 햇님이 뜨네"
징석과 징옥이 각 각 열여덟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이들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묘책을 내었다.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살아있는 멧돼지 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두 아들은 각기 멧돼지를 잡으러 산으로 갔다. 석양 무렵이 되자 징석은 큰 멧돼지를 메고 와서 어머니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멧돼지를 산채로 잡기는 하였으나 메고 올 기운이 없어서 죽여서 가지고 왔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기운을 칭찬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징옥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워 하자 징옥의 앞에서는 호랑이 조차도 무릎을 끓고 명령에 복종한다고 하며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이들은 징석이 잡아온 멧돼지를 요리하여 먹으면서 징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징옥은 사흘 밤 낮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시체만이라도 찾아와야한다고 나섰으나 징석이 이를 만류하고 자신이 징옥을 찾아오겠노라고 나섰다.

징석이 출발하려는데 징옥이 황소같은 멧돼지를 몰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간의 경위를 이야기했다. 징옥이 멧돼지를 발견하고 멧돼지를 쫓았는데 삼일간이나 쫓아다니자 멧돼지도 귀찮은 듯 말을 듣더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과연 대장군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칭찬하니 징옥은 대장군보다 높은 황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서도 그런 말을 함부로 입밖에 내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꾸짖었다.
징옥은 어려서부터 이런 말을 수 없이 하였다고 한다.
"보잘 것 없는 여진족들도 한때는 황제국을 세워 중원까지 위세를 떨쳤고, 몽고족도 원나라를 세워서 팔십여 나라를 속국으로 다스렸으며, 거란족도 요나라를 세워서 황제국의 위세를 떨쳤다. 뿐만 아니라 한족도 여러나라로 나뉘어져 있으나 처음부터 황제국이었는데 왜 우리만 황제국을 세워보지 못하고 당나라와 원나라를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가?

징옥이 열여섯 살 때 주변의 김해 고을에서는 호식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관아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징옥이 김해부사를 찾아갔다. 김해부사 정종은 민원관계로 한 소년이 찾아왔다는 이방의 말을 듣고 뇌물보따리를 자기고 왔느냐고 묻고서는 가지고 오지 않았다니까 만나지 않겠다는 분부를 전하였다. 이방은 징옥에게 가서 부사를 만나려거든 뇌물보따리를 가지고 와야 한다고 하였다. 징옥은 알았다고 답하고 그 길로 산으로 올라가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아 보자기에 싸서 다시 부사의 관아로 찾아갔다. 문지기에게 빨리 문을 열라고 호령을 하자 이방이 나왔다. 이 방은 보따리를 보자 기뻐하며 문안으로 안내했다. 이 때 이징옥이 보따리를 풀자 호랑이가 튀어나와서 이방에게 달려들었다. 이방은 날 살려라 소리치며 달아나고, 호랑이는 다시 부사가 거처하는 곳으로 돌진해갔다. 부사가 기겁을 하여 징옥에게 살려주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애원하였다.
이 때 징옥은 돈 좋아하는 놈은 죽은 돈보다 살아있는 돈 맛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도와주지 않았다. 급기야 부사는 다시는 뇌물을 받지 않고 선정을 베풀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에 이징옥은 두 번 다시 백성을 괴롭히면 호랑이밥을 면치 못하리라는 경고를 하고 호랑이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해부사는 이징옥이 양산부원군의 아들임을 알고 큰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징옥은 탐관오리가 주는 상은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김해부사 정종은 후에 함경도 종성부사가 되었고, 이징옥은 함경도 절제사가 되었다. 이 징옥은 정종의 과거를 까맣게 잊어 버렸으나 정종은 과거지사가 탄로날까 봐서 늘 노심초사하며 지냈다.
그러던 정종이 마침내 수양대군의 방을 읽고서 경솔히 행동하여 이징옥장군을 암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인천이씨집안내력 > ♧충강공 이징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조할아버지 상세편   (0) 2010.09.18

~우리 선조할아버지를 알자 상세편~

삼장수(三將帥)

이징석(1395-1461) : 이조 세종때의무관으로 본관은 양산이고 이전생의 큰아들이었다. 무과에 1등으로 급제하고 경상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 호치사, 경상우도 안무처치사등을 역임하고 지중추원사에 이르러 어버이를 섬기기 위해 사퇴하였다가 문종때 다시 중추원 부사에 이르고, 세조때 좌익공신으로 책록되고 양산군에 책복되었다.

이징옥(1399-1453) : 이조 세종때의 무관, 이징석의 아우로 무용이 뛰어나서 눈을 부릅뜨고 범을 노려보면 범이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니 한 화살로 죽였다 할 정도로 용맹스러웠다. 훗날 6진의 설치에 공이 컸으며, 김종서의 뒤를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는데, 정변으로 판관정종에게 살해되는 비운을 당했다. 당시 중앙정권에 대하여 반기를 든 점과 민심을 자극하고 이로 인하여 후일 이시애의 난의 선구가 되어 민의를 고무시켰다는 점 등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라 하겠다.(삼장수중 둘째 할아버지가 우리의 직계 할아버지임을 밝혀둠.)
참고:여기서 판관 정종과 할아버지에 대한 일화는 2편에 기재하겠음.


이징규(1403-1468) : 어린 시절은 3형제 가운데 가장 많은 전설과 수수께끼를 남겼는데, 세종2년(1420)에 무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있으면서 청백사로 유명하였으며, 두 형을 대신하여 향리에 자주 드나들면서 효성이 지극했다. 중형 징옥 탓으로 많은 수난과 비운의 공신이 됐다. 그러나 세조의 극진한 사랑으로 원종공신 일등으로 책록되었다.

삼장수민요의 유래

징석 13세, 징옥 9세, 징규 6세 대의 이야기이다. 이들 3형제는 서당에서 돌아오다가 양민의 재산을 약탈해 가는 50여명의 도적떼를 발견하자 모두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본 고을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보고 날개가 달린 장사라고 이름하게 되었고, 혼이 났던 도적떼들은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두번 다시 이 고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고을에는 도적떼로 인한 민폐가 없는 평화롭고 밝은 고을이 되어 고을 사람들은 "방아로구나. 방아로구나. 해가 지면 달님이 뜨고, 달님이 지면 햇님이 뜨네" 라고 노래하였다. 이것이 삼장수 민요였는데, 햇님과 달님은 삼장수를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삼수리 마을의 유래

수리의 원래 지명은 따로 없고 초산의 일부였는데 1371년 (고려 공민왕) 이징석, 이징옥, 이징규 3형제 장수의 아버지 이전생이 왕명을 받들고 전국을 순찰 도중 이곳 (하북면 삼수리 427번지)에 이르렀을 때 길지임을 발견하고 1380년(고려 우왕6년)경부터 이곳에 정착하면서 3남 2녀를 얻었는데, 훗일 아들 3형제가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한 후 종일품의 품계까지 오른 명장수가 되었다. 이로써 마을 이름도 세 장수가 태어난 마을이라고 삼수리라 칭함과 동시에 초산리에서 분리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