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貫은 仁川이며 號는 圓峰 諡號는 忠剛(正祖15년1791)으로써.判中樞院事 崇政大夫 從一品 咸吉道 都節制使 大金帝國 建國 大金皇帝에 추대되었다.

始祖 邵城伯 諱 李許謙의 後孫이다. 上代祖의 文獻 無證으로 中始祖 祖 諱 萬英 麗朝에 벼슬하여 李朝에 匡國 輔祚功臣 吏曹判書 仁川君 子 全生 太祖에 工曹典書 世宗에 梁山君 封 梁山府院君의 次男이다.

兄 諱 澄石 梁山君 襲封 弟 諱 澄珪 靈山君이며 配 貞敬夫人 碧珍 李氏 吏曹判書 愼之의 딸 三男一女를 두었다. 長男 滋源 次男 潤源 三男 淵源이다.

李澄玉은 1399년 태어나1453을 일생으로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무용이 특출하였다.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태종 16년(1416)에 부거책장 수비대장에 역임, 18세 때 무과 친시 별시 장원급제하여 영북진 절제사 소년 절제사가 되었다. 그 후 경원 절제사 경원 병마 절제사 회령 북진 절제사 경상도 도절제사 평안도 도절제사 함길도 도절제사 지중추원사 판중추원사를 태종 16년에서 단종에 이르기까지 두루 역임하면서 북방 국토 방위 중책의 임무에 전념하였다.

(왕조실록) 문종2년 사군 육진 개척에 용감히 위명을 떨친 공과 청렴결백의 숭고한 정신을 함양하고자 王의 特令으로 崇政大夫 당대 무신 제일의 從一品의 품계를 下賜받았다.

삼십여 년 변방 사군 육진 개척의 선봉 명장으로 위용과 위명을 만주 땅 요동까지 널리 과시하여 여진족들은 신의 존재로 추앙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 재직시 1453년 계유정난을 맞아 수양이 소인배 무리들과 합세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거사를 실행하던 중 김종서 장군과 많은 충신들을 주살하고 이징옥 장군이 크게 장애가 됨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직위를 파직하였다. 파직 당한 이징옥 장군은 수양의 음모로 판단 후임 박호문을 처형하고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충의의 정신으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백성을 위해 수양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기회에 만주 일대 여진족은 이징옥 장군을 영도자로 모시고 대민족 국가 건설에 앞장서자며 오부족 대표 건주 여진 추장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까가 주도 특사 김수산 부장 일행과 합의하여 대금제국을 건국, 영토를 만주 전역으로 선포하고 도읍은 오국성(혁도아랍)만주땅 건주여진 본거지에 정하고 대금제국 대금황제에 이징옥 장군을 추대하였다.

이징옥 장군은 대국을 건설하여 사필귀정을 결심하고 대금황제에 제위 대금제국 건국을 선포하였다.민족의 여망 대민족 건설에 대금제국 깃발을 들고 대금제국 만세 대금제국 만세 장엄한 행렬과 함성 소리는 만주땅 요동을 진동하며 오국성 입성 전야에 수양의 일당 정종,이행검의 흉계로 야습을 당해 대금제국 운명과 민족사의 비극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 변란에 長男 滋源 次男 潤源은 순절하였고 8살 三男 淵源은 유모가 구출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머나먼 경주 토함산 서편 아래 상신곡에 은거하였다. 혈족을 이어가기 위해 貫을 草山이라하고 개명을 台燁으로 하였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여 지금의 世系를 이어가고 있다. 十一世孫 震煥에 이르러 禮曹에 글을 올려 純祖 12년(1812)에 仁川으로 貫을 環貫하였다.



아-아 난세의 영웅 이징옥 장군 만고에 충신 이징옥 장군 540년이 지나도록 무덤마저 찾을 길 없어 자손의 한으로 남아 토함산 서편 아래 경북 경주시 외동읍 신계리 (상신)에 경모재를 짓고 신도비를 세워 위업을 새겨 제단을 설단하여 봄에 향사 10월 19일 대제에 봉축하고 왔으나 다행히 자손들이 정성을 모아 上薪祠 사우를 신축하여 위폐를 모시고 제단비도 새로 단장하여 忠剛의 얼을 추모하고 있다.

충강공 이징옥 장군께서는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과 영월 장능 단종 배식단 사우에 사육신과 더불어 충신으로 모셔 지난 역사를 되새겨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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