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사람1 2010. 9. 18. 12:50
인천 이씨 (仁川李氏)

1> 시조 : 이허겸[李許謙]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인천(仁川)은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매소홀현이었는데
경덕왕때 소성으로 개칭, 율진군(시흥군)의 영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이 되었으며 1949년 인천시로 개칭되고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시조 이허겸은 고려 현종조 상서좌복사 상주국 소성현개 국후에 올랐다
식읍 1천5백호를  받았는데 그곳은 인천으 로 자손이 그로 인해 문
학산 아래에서 세거하게 되어 관 향을 삼게 되었다.소성은 인천의 옛
이름이며,그 의 묘도 문학산 아래 연수동 간치도에 있으나 지금은 연
육이다.본 래 인천이씨는 가락국 수로왕자 중 모비의 성을 따라 허
씨가 되 었고,그후 신라 경덕왕때에 이르러 아손 허기가 당 현종조(
천보14년)에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여 사신으 로 입당 피신하는 현종을
호위한 공으로 황성인 이씨성을 사성받아 이씨로 된 연원을 말하고 
있다.
그후 그의 17세존 허겸(許謙)이 상서좌복야를 지내고
상주국에 올라 소성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받들고,
그가 식읍으로 하사받았던 인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가문을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연(子淵 :허겸의 손자)이 문종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공신에 올랐으며, 뒤에 개부의동삼사 태사겸 중서령 감수국사상주국으로 경원군 개국공에
이르렀고, 그의맏아들 호(顥)는 선종의국구로 문종때 호부낭중을 지낸후 경원백에 추봉되어
아우 정(문하시중으로 경원백에 추봉), 의(재상에 오름) 등과 함께 가세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때 형조참판과 함길도 도체찰사를 지낸 관(灌)과
대제학과 예조판서를거쳐 참찬의정부사에 이르러 영의정에 추증된 문화(文和)가 유명했으며,
효상(孝常)은 지돈령부사에 올라 학문과 충효로 명망이 높았다.
참판 중손(仲孫)의 손자인 성동(成童)은 직제학과 대사간을 지내고 중종때 형조참의에 올랐으나,기묘사화때 파직되기도 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 인(寅)의 아들 휴복(休復)이 곽재우와 함께 왜병과의 싸움에서전공을
세웠으며 이괄의 난 때는 관군의 별장으로 안현에서 공을세워 진무3등공신으로 인원군에
봉해져서 무명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며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남한에 총 14,605가구, 61,0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전남 장흥군 관산면 동두리
충죽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
전남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
충남 청양군 대치면 형산리
대구시 동구 서변동, 연경동
전남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
경남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군복면 명관동
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집정리
경남 합천군 쌍백면 하신리, 운곡리